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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꺼잉족의 기독교 개종과 종족성의 형성

김인아
(동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원 교수)

„카렌족‟(Karen)으로도 알려져 있는 „꺼잉족‟(Kayin)은 미얀마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무슬림 로힝자족 사태 이전부터 고질적인 종족 갈등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소 수종족으로, 미얀마 역사 속에서는 1885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해 최근에 이르기까지 미얀마 정부군에 대항해 강력한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해온 정치적 집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실제로 1947년부터 미얀마 정부군과 꺼잉족 무장반군 간 치열한 내전이 계속 되 어왔고, 그런 와중에 수많은 꺼잉족이 삶의 터전을 잃고 현재 미얀마와 태국 국경 지역 에 걸쳐 10개가 넘는 난민캠프에 약 40만 명 이상이 수용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미얀마 내 꺼잉족 분쟁의 문제는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 및 NGO 등 서구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슈가 되어왔다.

그러나 꺼잉족이란 종족집단은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자체만 으로도 매우 복잡한 개념을 지닌 종족이다. 사실 꺼잉족의 대부분은 매우 복잡하고 다 양한 하위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얀마 전통시대의 역사 속에서 이들 하위집단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꺼잉족으로 분류되기를 강력하게 거부해왔다. 원래 꺼잉족의 개념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비교언어학자들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집단을 언어의 기원에 따라 분류한 언어학적 유산의 결과물로서, 언어계통상 티베트―버마어파(Tibet-Burman)의 꺼 잉어군(Karenic)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집단을 „꺼잉‟으로 통칭한 것이다.

그러나 꺼잉족의 경우 대부분 자체적인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아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꺼잉어군의 범위도 언어학자들 간 의견 이 매우 분분해왔다. 게다가 미얀마에서도 산지, 평원 및 델타 등 대대로 살아오는 터 전으로서의 영토가 다양하고, 그 하위집단들 간 언어, 종교, 관습, 생계경제 유형, 정치 구조 등 그 문화적 양상도 매우 다양했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학적 근거는 꺼잉족의 실 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태국-미얀마 국경 지방의 한 꺼잉족 마을의 기독교인들

황금서(黃金書)와 백인형제 신화의 선교적 활용

영국은 1820년대 제1차 영국-미얀마전쟁에서 승리하고 미얀마 서부 여카잉(Rakhine)

지역과 남부의 떠닝다이(Tanintharyi, Tenasserim) 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 무렵 미 얀마에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꺼잉족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꺼잉족의 정체성 형성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백인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주로 상좌불교를 신봉하는 버마족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 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버마족을 중심으로 수백 년 뿌리내린 불교적 전통과 신 앙을 바꾸기가 쉽지 않자 선교사들은 주로 정령신앙을 신봉하고 있었던 꺼잉족에게 발 길을 돌렸다. 이때 수많은 꺼잉족 마을에서 기독교로의 대대적인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 했다. 이 시기에 미얀마에 도착해 선교 활동을 펼치던 프란시스 메이슨(Francis Mason) 목사의 저서 『황금빛 반도 꺼잉족』(The Kayins of the Golden Chersonese)에서 메이슨을 돕던 맥마혼(McMahon) 선교사는 꺼잉족 정령신앙과 버마족 불교 사이의 차이점에 대 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자연계의 다양한 물체에 존재하는 수호신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 령신앙의) 총체적인  구조를 폐기하려는 의도나 그에 대한 편견은 없다. 꺼잉족 은 윤회라는 굴레에 구속되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인 부처에 대한 믿음에 구속      된 버마족보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훨씬 더 민감했다. (중략) 버마족의 믿음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인간의 신념‟이다. 그러나 꺼 잉족의 신념은 이해나 깊은 뿌리를 두지 않는 „어린 아이의 신념‟이다. 꺼잉족   은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따르더라”(사도행전 8장 6절)는 구절에서 나타나는 사마리아인과도 같다. 반    면 버마족은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실인지 아닌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한 베뢰아 사람과도 같다.

다시 말해서 버마족은 막대한 문학적ㆍ종교적 전통과 그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믿 는 불교라는 뿌리 깊은 전통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행위는 내세에 더욱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선행을 쌓는 데 헌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 교적 박해, 사회적 외면, 개인적 위협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신앙체계를 지닌 꺼잉족은 선교의 대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꺼잉족 개종을 위해 꺼잉족의 문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 운 사실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바로 꺼잉족의 각종 신화나 고대 시에서 나타나는 내용 이 마치 성경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꺼잉족의 고대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제일 처음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세웠는가?

그것이 가장 최초로 형성되었을 때

창조자는 누구였단 말인가?

세상이 최초로 창조되었을 때

에돌리우스(Edolius)와 흰개미가 분주히 움직였다

세상이 최초로 형성되었을 때

이 두 생명체는 서로를 도우며 그 일을 행했다

위의 시에서 세상을 창조하는 데에 신과 함께 등장한 흰개미의 역할은 세상 곳곳에 높은 흙무더기를 쌓아올리는 것이었는데, 이 흙무더기는 오늘날 꺼잉족이 주로 거주하 는 고산(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4행에서는 구체적 인 창조주의 존재인 „유와(Ywa)‟가 등장한다.

세상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신이신 유와가 그것을 만드셨다네

세계가 처음으로 빚어졌을  때

바로 신께서 그 일을 행하셨다네

유와의 속성에 대해서 꺼잉족 한 고대 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은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시네

그는 태초에 존재하셨네

신은 세세토록 영원하시네

그는 세상의 시작 가운데 존재하셨네

신은 진실로 변함없으며 영원하시네

그는 세계가 시작되던 고대에도 존재하셨네

신의 생명은 끝이 없다네

연속되는 세계조차 그의 영겁을 측정할 수 없네

신은 칭송할 만한 모든 존재에 있어서 단연 완벽하시네

창조주는 완전하시고 선하시며 세세토록 존재하신다

땅은 신께서 딛는 발판이고 하늘은 그가 계신 장소다

그는 모든 것을 주시하시고 우리는 그에게 감출 것이 없도다

또한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꺼잉족 신화도 발견했다.

그는 인간을 창조했는데 흙으로 사람 형상을 빚고 창조의 작업을 끝마쳤다.  

그는 여성을 만들 때 남성의 갈비뼈를 떼어내어 창조하셨다. (중략) 아버지이신 신께서 그들의 코를 통해 생명을 불어넣으니 그들이 인간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생명을 얻고 인간이 되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신께서는

음식과 얼음, 불, 물, 소, 코끼리를 창조하셨다.

선교사들은 위의 꺼잉족 고대시를 수집하면서 그들이 창조주로 신봉했던 „유와‟라는 존재에 주목하면서 이 명칭이 히브리어 이름인 „야웨(Yaweh)‟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주 시했다. 당시 꺼잉족은 그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가 져다주었기 때문에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다. 1830년경 꺼잉족의 최대 관심은 악령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다양한 의례를 지내고 좀 더 확실 하고 강한 구원론적 지식을 찾아야 했다.

이 고대 시에서 등장하는 유와라는 존재는 여호와와 같은 절대주 창조자의 개념은 아니었으나, 꺼잉족은 당시 어떤 신들보다 유와를 가장 신성시했기 때문에 유와의 신화 와 연결되는 기독교의 존재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따라서 개종 초기에는 꺼잉족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 중의 한 지파의 후예로서 기독교-유대인 기원의 민족이 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꺼잉족이 미얀마로 이주해 들어오는 과정 중에 아르메니아에서 중국으로 이동을 했던 네스토리우스교 유대인들의 거주지를 지나 면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꺼잉족의 개종을 위해 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810년 미얀마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펼친 조지 보드만 (George Boardman) 선교사는 꺼잉족 지도자로부터 황금으로 만든 서적에 관한 신화를 전해 듣고, 단순한 포교가 아닌 좀 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선교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되었다. 보드만으로 하여금 실증적인 선교의 대한 욕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꺼잉족 신화 들은 내용에서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 꺼잉족의 „황금서와 백인형제‟ 그리고 유와 에 관한 내용이었다. 꺼잉족이 전하는 „황금서와 백인형제‟, 유와에 관한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 유와는 항상 우리와 함께 했으나, 어느 날 그는 이 땅을 떠나려고 하면서 그의 아들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아들들 중에는 꺼잉족, 버 마족, 타이족, 중국인, 백인도 있었다. 꺼잉족 아들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백    인 아들은 제일 어렸다. 유와는 맏이인 꺼잉족 아들에게 황금으로 만든 책을 건네주었다. 꺼잉족 아들은 그 책을 자신이 농지로 개간할 들판으로 가져가  옆  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잠시 두었다. 그러나 그가 들판에 불을 지르다가 황 금서를 태워버렸다. 책이 타고 남은 재는 주위를 배회하던 닭들이 모두 쪼아 먹었다. 유와는 막내인 백인 아들에게도 책을 주었는데, 오늘날 백인들이 경제 적으로 발전을 이룬 것도 유와로부터 건네받은 황금서 덕분이다. 중국인과 타 이족 아들들은 타고 남은 황금서 재만을 취했다. 유와는 그렇게 떠나버렸고 꺼 잉족에게 남은 것은 재를 쪼아 먹은 닭의 뼈 몇 조각뿐이었다.

황금서 신화를 콘클린(Conklin)은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유와가 이 땅을 떠나려고 하면서 그의 아들들을 불러 모아 두 형제에게 황금   으로 된 지혜의 책을 건네주었다. 맏이인 꺼잉족 아들은 자신의 건네받은 지혜  의 책을 들판 가에 두었다가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백인 아우는 황금으로     된 지혜의 책을 들고  서양으로 떠나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꺼잉족  아들  은 지혜의 책을 소실한 후 갈수록 생활 형편이 어려워져 갔으며 궁핍과 고통      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백인 동생이 이 땅으로 돌아와 자신이 받은 지혜의 책을 꺼잉족에게 건네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황금서 신화는 유와로부터 황금서를 받은 맏이인 꺼잉족은 고산지에 거주하면서 화 전경작을 주로 행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해 경작지를 태우는 과정에서 책을 모두 태워 버렸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사회적ㆍ경제적 역경에 처하게 되었으며, 훗날 막내인

„백인형제‟가 그 황금서를 자신들에게 갖다줌으로써 지금의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내용 을 담고 있다. 아마도 보드만을 비롯한 당시 꺼잉족과 접촉한 선교사들은 이러한 신화 를 접했을 때, 그들이 가져온 성경이 백인형제가 갖고 올 황금서라고 주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규모 기독교 개종

꺼잉족은 버마족의 경제적 수탈과 버마족 왕조와 태국의 타이족 왕조 사이에서 겪어 왔던 역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금서와 백인형제의 귀환을 학수고대했다. 이러한 열망 은 나중에 버마족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더 나아가 천년왕국 건설에 대한 염 원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버마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존재를 창조주 유와가 보내주 신 형제 즉 서양인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상당수의 꺼잉족 마을에서 기독 교로의 폭발적인 개종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도 버마족에 대한 증오와 백인에 대한 기대는 1830년 미얀마 남부의 메익 (Myeik/Mergui) 지역에 있는 꺼잉족 마을을 방문한 조너선 웨이드(Jonathan Wade) 목사 내외에게 베풀어진 선교사 환영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환영회에 대해 메이슨 목사 는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미얀마 꺼잉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역사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이방인들로 인해 배우가 아닌 현실 속의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역사나 다름없다. 그 예로 웨 이드 내외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꺼잉족 마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받은 환영회는 매우 거창했던 것으로 전하나 기록을 찾기    는 어렵다. 마을사람들은 웨이드 내외를 오늘날 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촌 장에게 데려갔고, 웨이드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여러 명의 젊은 여성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젊은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노래

를 부르며 그들을 맞이했다.

주께서 그의 종을 우리에게 보내사, 종이 여리고 서둘러 오더라.

불교 승려들은 주의 종에게 권좌를 내놓기 위해 그 짧은 통치 기간을 접고 떠나더라.

꺼잉족 마을사람들의 폭발적인 개종과 백인 선교사들에 대한 호의는 메이슨의 또 다른 증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꺼잉족 마을에서의 선교 활동이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결과, 꺼잉족 마을 사람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선교를 하여도 복음을 아주 잘 받아들인다는 인상      을 갖게 되었다.

기적과 같이 황금서를 가지고 귀환한 이 백인 선교사들과의 조우를 통해 신화가 현 실 속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은 최초의 꺼잉족 인물은 미국인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의 문하에 있었던 꼬따뷰(Ko Tha Byu)였다. 1813년 미얀마에 도착해 다 수종족인 불교도 버마족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던 저드슨은 불교도 버마족의 개 종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저드슨은 당시 꺼잉족 100명을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 버마족 두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829년 꺼잉족 마을로 선교지를 옮겼고 이때 저드슨이 제일 처음 만난 꺼잉족 사람이 꼬따뷰였다.

꼬따뷰는 저드슨 문하에서 기독교 교리를 배웠고, 문식력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버마어를 학습하고 마침내 버마어 성경을 읽게 되었다. 전인격적으로 기독교로 귀의하 게 된 그는 각 산악지역 꺼잉족 마을에 가서 „황금서와 백인형제‟의 귀환을 전파했고, 그의 열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각 마을의 꺼잉족 지도자들이 미얀마 하부 지역에 있 는 백인 형제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찾아 나서기도 했다. 꼬따뷰는 많은 꺼잉족의 지지 를 받았으며 그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부 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전파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꼬따뷰는 보드만 목사의 선교 활동에도 동행했다. 그는 보드만의 통역관 역할을 자처하면서 꺼잉족 마을들을 순회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1831년 보드만은 임종의 순간까지 꺼잉족 신도들에게 세례의식을 거행했다. 보드만 의 사후에도 저드슨은 지속적으로 꺼잉족을 개종하는 데 진력했고, 그의 선교활동은 몰 러먀잉(Mawlamyine/Moulmein) 북부에서 약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꺼잉 족의 개종이 급속도로 일어났는데, 교통이 용이하지 않은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는 꺼잉 족 주민들 중에는 생애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그 자리에서 단 몇 시간 만에 세례를 받 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꼬따뷰와 같은 동족인 꺼잉족 전도사가 그들 의 개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꺼잉족에게 소개된 이 새로운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 지시키고 또 교회와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 주민들의 동원을 이끌어낸 인물들은 모두 꼬따뷰와 같은 꺼잉족 전도사들이었던 것이다.

병상에 누운 조지 보드만 선교사가 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고 있는 꺼잉족

병상에 누운 조지 보드만 선교사가 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고 있는 꺼잉족

이렇듯 종족 개념이 모 호한 꺼잉족은 영국이 미얀 마로 진출하기 시작한 19세 기 초 시작된 백인 기독교 도들의 유입과 그들과의 접 촉을 통해 종족집단 의식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그것은 무엇보다도 꺼잉족 마을들에서 폭발적 인 기독교 개종이 일어나면 서 집단적 차원에서 종족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 이었다.유독 미얀마 하부 지역의 꺼잉족 사이에서 폭 발적인 기독교 개종이 일어 난 데에는 꺼잉족이 지니고 있었던 „황금서와 백인형제‟ 의 신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화는 미얀마의 식 민시대가 종식되고 오늘날 태국-미얀마  국경  지방의  한 꺼잉족 마을의 기독교인들에 이르기까지 꺼잉족의 역사적인 진로를 결정짓는 강력한 내러티브였다. 꺼잉족 신화의 내용은 초기 백인 선교사 들의 종교적 상상력과 버마족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바라는 꺼잉족의 열망으로 인해 현 실의 실제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백인형제와 꺼잉족의 조우 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신화가 실현되는 필연적인 순간이 되었다.

꺼잉족의 기독교 개종에 있어서 꼬따뷰의 역할과 그 의미에 대해 맥마혼(McMahon) 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꼬따뷰가 개종한지 12년이 지난 1840년 사망하자, 그와 동향인 기독교 신자 1,270명이 일제히 버고(Bago)로 몰려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꼬따뷰의 노고에 영광을 돌렸다. 그의 죽음 이후 기독교는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1852년 영국과 버마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하부 버고 지역에 이미 5천여 명의 신도를 포함 하는 76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신뢰를 받던 꼬따뷰의 선교 활동과 더불어 각 마을에 도달한 성경책을 두고 꺼잉족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마샬(Marshall)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이 엄청나게 보배로운 책을 앞에 두고서 사람들은 절을 올리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거룩한 책을 어루만지거나 입을 맞추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   이 그 책을 보고자 모여들자 마을 지도자는 그  책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   도록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보  았다.꺼잉족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황금서를 성경과 동일시했고, 성경이 각 마을에 도착했 을 때 마을사람들은 기쁨이 넘쳐났다. 성경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버마족과 중도에 마주 치지 않도록 밤낮으로 이동했다. 성경이 마을에 도착하면 그 소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가 마을 전체가 모여 „꺼잉의 책‟의 기적적인 도착을 맞이했다. 선교사들은 그들대로 꺼잉 족 신화에서 등장하는 백인형제와 자신들이 동일시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이를 선교 활동의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했다. 황금서 신화로 인해 백인은 신화를 현실 속에서 실 천하듯, 구원자나 후원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스고 꺼잉족의 경우 그들은 전도사를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 문에 개종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메이슨 목사는 불교도가 많은 뽀 꺼잉족과 스고 꺼잉 족을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스고 꺼잉족의 폭발적 개종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꺼잉족의 일부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어 기독교로 개종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뽀족 사람들이 거의 개종하지 않는 이유이다. 혹자는 낮은 개종률을 선 교사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역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그것      은 사실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제일 처음 꺼잉족 사람들을 만났을 때 뽀 꺼잉  족과 스고 꺼잉족 사이에 차이가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보드만 선교사가 기독교로 개종시킨 최초의 7인 중 단 1명만이 뽀 꺼잉족이었고 나머지 6명은  스고 꺼잉족이었다. 가장 빠르게 복음을 받아들인 스고족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스고 꺼잉족은 빠른 속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는 것을 물론, 음주나 희생제와 같은 모든 전통적인 의식도 포기했다. 이 단계에서 선교사들은 그들에 게 성령의 도움이 임재했음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기 때문에 꺼잉족에게 호소할 때 성령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날에 도 꺼잉족의 기독교 문헌에서는 성령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스고 꺼잉족의 성령 에 대한 증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나에게 임재한 성령은 이 세상 무엇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으   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임재하길 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새로운 초자연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꺼잉족 사람들은 이전까지 숭 배하던 신으로부터 벌을 받을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의 힘을 증명할 새로운 종교적 의식이 필요했다. 이때 도입된 것이 세례식 이었다. 개종 이후 세례는 필수적이었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올바른 믿음과 이해가 뒤따라야 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지원한 많은 꺼잉족에게 있어 세례는 꺼잉족의 새로 운 정체성을 향한 일종의 „여권‟의 역할을 했고 매우 강력한 도구로 기능했다.서구문명의 이식 : 근대식 건물, 교육, 문자서구 선교사들은 성경책과 세례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비롯해 학교, 병 원 등 근대식 건물들을 세워 꺼잉족에게 서구 문명을 이식시켰다. 서구식 교회의 건설 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꺼잉족을 하나로 규합하는 데 일조했고, 개종한 꺼잉족은 미 션스쿨에 입학해 서구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45년 몰러먀잉에는 비니(J. G. Binney) 선교사에 의해 꺼잉족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훗날 이 학교는 오늘날 양곤주의 인세인 (Insein) 지역으로 옮겨졌다. 1875년에 양곤에 세워진 „저드슨 칼리지‟라고 불리는 침례 교 대학은 꺼잉족 학생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꺼잉대학교‟라 고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대학은 남녀 할 것 없이 수많은 젊은 꺼잉족에게 고등교육 을 제공했으며, 꺼잉족은 이러한 서구식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종족의식을 고취시켜 나 갔다.교회는 꺼잉족의 문화적 측면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꺼잉족은 예배에 참석할 때에도 아래 그림과 같은 전통복장을 착용했다. 꺼잉족의 전통 행사는 기독교인 마을에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특히 노래와 춤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꺼잉족의 언어, 구전, 전통적 생활양식 등이 교회에 의해 보호 및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양인의 보호 아래 유지되던 꺼잉족의 전통양식은 훗날 버마족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버마족에 대항하는 천년왕국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꺼잉족 문자

선교사들은 교육의 보급과 함께 꺼잉족의 문자도 만들었다. 1832년 조너선 웨이드 목사는 미얀마어 문자에 스고 꺼잉어를 접목시켜 새로운 꺼잉어 문자를 만들었으며, 1843년에는 성경과 신학 교재를 꺼잉어 문자로 번역했다. 저드슨이 미얀마에 도착한 해 로부터 3년 후인 1813년에는 미얀마에서의 선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인쇄기도 도입되었다. 1832년에는 4대의 인쇄기가 추가적으로 도입되어 1843년에는 스고 꺼잉어로 된 신약성서가, 1853년에는 뽀 꺼잉어로된 신약성서가 출판되기도 했으며, 그사이 웨이드 박사는 스고어와 뽀어 사전 및 문법서를 집필하는 작업도 수행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 찬송가와 선교 교재에 쓰이는 모든 언어가 꺼잉어로 대체되었으며, 설교도 꺼잉 어로 이루어졌다.

꺼잉족 전통복장의 모습
왼쪽은 여성용 원피스, 가운데는 남성용 통치마, 오른쪽은 남녀의 상의

1842년에 미얀마 동남부의 더웨(Dawei/Tavoy) 지역에서는 메이슨 목사의 후원으로 “모닝스타지”(The Morning Star)가 창간되었다. 이 월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간행이 중 단되었다가 복간되어 네윈(Ne Win)이 1962년 강제로 폐간하기까지 지속적으로 발행되 었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가장 오래된 소수종족어 간행물이었다. 이로써 꺼잉족 문자 문화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꺼잉어를 구사하는 „우리 꺼잉족‟이라는 상상의 공 동체로서의 자의식을 출현시키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꺼잉어의 문자가 발달하고 성경이 번역되어 꺼잉족 사회 전체로 꺼잉어 문식력이 빠르게 전파됨에 따라 꺼잉 문화도 발달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 중 남긴 가 장 큰 기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식력의 증가와 문학의 발달로 인해 다양하고 복 잡했던 여러 방언들이 두 개의 하위 언어인 스고 꺼잉어와 뽀 꺼잉어로 흡수되었고, 이 것은 종족적 분류와 이 지역 주민들의 자의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의 꺼잉족 선교는 해가 거듭될수록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1828년 최초의 세례교인이 된 꼬따뷰를 시작으로 1840년에는 꺼잉족 기독교인의 숫자가 1,270명으로 증가한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1868년에는 기독교인 숫자가 무려 18,254명으로, 그리 고 1892년에는 28,837명으로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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